'하필 앙숙끼리' 이란-미국 잉글랜드-웨일스 벼랑끝 16강 티켓 대결
그만큼 미국은 이란을 믿었다. 그러나 지난 40년간 미국과 이란은 서로 원수로 지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도대체 양국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악연의 뿌리를 좇는 이란과 미국의 시선은 서로 다르다. 첫 악연은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에서 시작되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은 긴장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아랍 왕정을 강타했던 군부 쿠데타로 이집트·이라크·시리아 등에서 사회주의 공화정이 들어선 기억 때문이다. 이들 아랍 공화국은 반미·반서구 경향이 강했다. 미국이 구상하는 대소련 봉쇄의 냉전 틀이 흔들렸던 기억이 이란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혁명 이전 미국과 이란 팔레비 왕가의 관계는 돈독했다. 안보 및 경제협력도 견고했다. 이란의 경우, 이슬람을 믿는다지만 세속주의에 가까워 성직자와 일부 신실한 무슬림층을 제외하고는 대개 자유롭고 발랄했다. 테헤란 거리에는 살롱이 즐비했고, 여성들의 사회활동도 활발했다.
2007년 샘물교회 자원봉사단 23명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게 44일 동안 피랍되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한국 사회가 겪었던 충격을 생각해보면 미국이 이란을 떠올릴 때 어떤 느낌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Reuter이란 혁명 세력은 주이란 미국 대사관 소속 민간인 52명을 1979년 11월4일부터 444일 동안 억류했다. 두 번째 악연은 레바논에서 이어진다. 베이루트 주재 미국 대사관과 미국 해병대 피습 사건의 기억이다. 레바논 내전의 혼돈이 지속되던 1983년 4월19일, 베이루트의 미국 대사관이 차량 폭탄 테러를 당한다.
(2) 유럽연합(EU) ㅇ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EU는 WMD 비확산, 테러리즘, 인권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미국과 공조해 왔으나, 경제문제는 독자노선을 추구하였음. - EU 국가는 200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대이란 제재에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이란도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고, 자본과 기술 도입을 위해 대EU 관계 개선 노력 경주 - 2000년대 초반 하타미 대통령의 EU 주요국 방문으로 정치 분야에서 양자관계가 크게 개선 ㅇ 2003년 이후 이란 핵문제 부상 및 인권 문제 등이 양측간 협력 확대의 장애로 작용하였으며, 2005. 8월 아마디네자드 정부 출범 이후에는 더욱 악화됨. ※ 영국은 2011. 11월 이란 군중의 영국 대사관 난입사건 이후 공관을 철수하였으며, 2014년 현재 대사급 상주 외교관계 회복을 논의중 ㅇ EU의 모게리니(Federica Mogherini) 외교안보 고위대표가 P5+1/이란간 핵협상을 주도하는 등 이란 핵 협상 타결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함. (3) 러시아 ㅇ 이란과 러시아 양국은 전통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었으나, 1979년 이슬람혁명 후 이란-미국관계가 악화된 것과 달리 이란-러시아 관계는 상대적으로 계속 증진되어 옴. ㅇ 특히, 러시아가 2011년 페르시아만 연안 부셰르(Bushehr)에 1, 000MW 규모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지원하고, S-300 미사일 체계 공급을 약속하는 등 양국간 안보·경제 분야 협력을 강화한 바 있음. - 이란 핵문제 대두후 핵연료 공급 및 S-300 공급 문제는 한동안 답보상태였으나, 2015.
이란의 주요 대외관계 상세보기|이란 정세 동향 주이란 대한민국 대사관주요 대외 관계 (1) 미 국 ㅇ 팔레비 왕정 시절 이란은 미국의 역내 최대 동맹국이었으나,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반미 이슬람 정권이 출범함에 따라 양국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음. - 1979. 11월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 점거사건 이후 양국은 외교관계를 단절하였으며, 미국은 자산 동결 등 제재 부과 ※ 1980년 이후 미국은 대이란 양자관계를 주이란 스위스대사관을 통해, 이란은 대미국 양자관계를 주미국 파키스탄대사관을 통해 처리 ㅇ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1995. 4월 미국기업의 대이란 금수조치에 관한 행정명령에 이어, 1996. 8월 이란의 석유‧가스 개발사업에 대한 제3국 투자기업 제재를 내용으로 하는 경제제재법(ILSA: Iran Lybia Sanctions Act)을 채택하였으며, 동 법률은 매 5년마다 연장 시행되고 있음. ㅇ 양국관계는 2000년대 들어 아프간 탈레반 축출시 협력 구축 등 일부 개선의 조짐이 있었으나, 부시(George W. Bush) 미 대통령이 2002년 연두교서에서 이란을 북한·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하면서 다시 악화일로를 걷게 됨. - 2002년말 이란 반정부 단체에 의해 이란의 비밀 핵프로그램이 폭로됨으로써 양자관계는 보다 악화되었으며, 미국은 대이란 경제제재를 시행중 ㅇ 아마디네자드 취임 이후 핵문제를 둘러싼 미-이란 관계는 더욱 냉각되었으나, 2015년 7월 핵 협상 타결을 계기로 관계 개선의 기대감이 조성되고 있음.
이란 핵 과학자 잇단 테러…갈등 고조 - KBS News
조지 W. 부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실질적으로 국가 근대화 운동의 성격도 지녔다. 히잡 착용 및 일부다처제 금지, ‘아시아가 아닌 서양(즉 아리안)’의 정체성 부각, 여성참정권과 교육 기회의 확대 등을 추진했다. 옆 나라 터키의 케말리즘(정교분리, 근대화 등 세속주의 추구)과 많이 닮았다. 팔레비의 백색혁명은 실패하고 만다. 왕정의 절대 권한을 유지하고 반대파를 무력화하려는 동기가 앞서 나갔다. 동시에 반정부 그룹을 너무 키웠다. 토지개혁으로 이슬람 모스크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지방 토호들의 재산 기반까지 약화시켰다. 페르시아의 오랜 전통에서 유지되어온 ‘바자르 상권’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거센 반발을 불렀다. 결국 이슬람 세력과 지방 토호, 바자르 상인들이 연대해 반(反)팔레비 왕정 혁명의 토대로 성장한다. 이란 국민은 왕실의 실정과 독재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믿었다.
미국과 이란의 질기고 깊은 악연ⓒAP Photo1월6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반미 시위에 참석한 시민들이 피살된 솔레이마니 총사령관의 그림을 들고 있다. 2020년 새해 하늘에는 전쟁의 구름이 짙게 깔려 있다. 지난해 말 친이란계 민병대의 공격으로 이라크의 미군 주둔지에 근무하던 미국인 한 명이 사망하면서 시작된 암운이다. 이후 놀라움의 연속이다. 미국은 이란 최고 실세 가셈 솔레이마니를 이라크에서 폭살했다. 이란은 미군 주둔지에 미사일 스물두 발을 날렸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일촉즉발의 위기는 일단 넘겼으나 불안감은 여전히 퍼져 있다. 이번 사건은 우발적 충돌이 아니라 조금씩 고조되다가 촉발된 위기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미국과 이란은 가장 가까운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혁명 직전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란의 마지막 왕 팔레비 에게 “이란은 중동이라는 혼돈의 바다에 떠 있는 유일한 안정의 섬이다”라고 상찬했다.
그 불만이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의 토양이 된다. 이란이 미국을 싫어하는 세 번째 이유는 좀 더 독특하다. 이유 없이 이란을 미워한다는 불만이다. 독일과 일본은 숱한 미군 장병들을 살상했음에도 지금 동맹국이다. 베트남 역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잘 지내고 있다. 심지어 핵무기를 만들고 탄도미사일 실험을 서슴지 않는 북한과도 미국은 나름 관계 개선 노력을 한다. 반면 이란은 단 한 번도 미국과 전쟁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미국은 오직 이란만 계속 몰아붙인다는 것이다. 물론 호메이니가 미국을 사탄으로 규정하면서 타도를 외치긴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든 이란 지도자들이 반미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 같은 이들은 미국과 잘 지내보려고 노력한 지도자다. 2001년 9·11 사태 당시에도, 일설에 따르면 제일 먼저 미국에 위로 전문을 보낸 해외 정상이 하타미 대통령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테헤란에서는 테러를 규탄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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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모사데크를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1953년 영국과 미국의 해외 정보기관이 움직여 현직 이란 총리 축출 공작을 벌인다. 이른바 ‘아약스 작전’을 통해 모사데크를 실각시키고 왕정을 복원한다. 이란 국민은 민주주의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이중적 태도를 기억하고 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상찬하지만, 자국의 이익이 침해되자 중동의 토머스 제퍼슨이 되었을지 모를 모사데크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쫓아냈다.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AP Photo1953년 영국과 미국의 정보기관은 ‘아약스 작전’을 통해 이란의 모사데크 총리(위 가운데)를 축출했다. 미국과의 두 번째 악연은 미국의 팔레비 절대왕정 옹호를 계기로 깊어졌다. 모사데크 축출 후 등장한 무함마드 리자 샤 팔레비 국왕은 이란을 완전한 친서방 세속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다. 1961년 이른바 백색혁명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다. 왕실 독재에 대한 비판을 비켜나가면서 반대 진영을 무력화하기 위한 일종의 국가 개조 동원 운동이었다. 백색혁명의 명분이나 슬로건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단순히 자국 내 정치행위뿐 아니라 이란식의 정치체제를 중동 전역, 나아가 이슬람권으로 확장하겠다는 목표다. 그 대표적 대리 세력이 헤즈볼라다. 그 씨를 뿌리고 관리하고 성장시켜온 주역이 이번에 피살된 솔레이마니가 이끌었던 쿠드스 부대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 합의를 파기하고 제재를 복원한 명분은 ‘이란의 합의 위반’이 아니다. 중동 지역 곳곳에 산재하는 친이란 무장세력의 위협과 미사일 개발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52명 인질 사건을 언급하며 이란이 보복 공격에 나설 경우 같은 수의 이란 목표물을 타격하겠노라 천명했다. 1979년과 1983년의 아픈 기억이 2020년 1월에도 여전히 쓰린 통점으로 남아 있다. 이란 처지에서도 할 말이 적지 않다. 더 긴 원한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미국에 배신당한 첫 기억은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냉전이 막 고착되던 1951년 이란에서는 정치적으로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했다. 입헌 민주주의가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다. 민족주의 정치인 모하마드 모사데크는 이란 리자 샤 팔레비 왕실과의 합의로 선거를 거쳐 첫 선출직 총리로 등장했다. 민주주의를 향한 이란 국민의 열망은 컸다. 왕실도 더 이상 절대왕정을 유지하기 버겁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헌 민주주의의 첫걸음은 곧 난항에 빠졌다. 모사데크 총리의 국유화 정책 때문이었다. 이란산 석유로 번 돈이 영국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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